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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한사랑회복수기 회복작 - 무제(無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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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오OO님 작성일19-08-26 14:41 조회21,32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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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란하게 전화벨이 울렸다. 제수씨 였다.

엄마가 위독하다는 전갈이었다. 2009년 추석을 며칠 앞둔 음력 86, 추석대목으로 인해 눈 코 뜰 새 없는 나날을 보내던 나에겐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연락을 받고 입원중이시던 OO 병원 XXX호실 도착하니 몇 분의 친척분들과 가족들이 있었다. 뒤이어 주치의와 간호사가 들어와 심정지 체크를 한 시각은 내가 막 병실에 들어서던 순간이었다.

돌아가시 전에 마지막 하신 말씀은 나를 찾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엄마 얼굴만 바라볼 뿐이었다.

 

2

20023월 아내와 이혼 후 초등학교 2학년 아들, 세 살배기 딸을 안고 김해로 이사오던 날 억수같은 비가 내렸다.

그날 바로 중국 민항기가 추락하던 날 2002415일 이었다.

비오는 날 이사하면 잘 산다는데 하필이면 그날 그런 큰 사고가 나다니 나에게 큰 악재가 되어 다가올 것만 같았다.

그후 나는 이미 김해에서 살고 계시던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미리 구입해둔 25평 빌라에서 함께 살게되었다.

나는 조급했다. 빨리 직장을 얻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러하지 못했다.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버리던 중 그래 5월과 72개월은 나에게는 악몽의 시간이었다.

영업용 화물차 구입 후 거주지 내 배송이라는 짧은 문구 하나에 현혹되어 1억에 가까운 돈을 순식간에 날려버린 것이었다. 참담한 심정이었다.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그 때부터 은 시작되었다. 평소에는 절주를 해가면서 마시던 술이 며칠 동안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퍼 마셨고 식사는 당연히 하지 못했다. 보다 못한 어머니가 평소 내가 좋아하던 밀가루 음식으로 나를 달랬고, 나는 조금씩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던 나는 다짐했다. 그래, 여기서 무너지면 어머니, 아버지, 아들, 딸 누가 책임지나? 그래, 정신차리자. 이렇게 마음 먹으니 자연스레 술은 멀어지고 식사도 매끼니 먹게 되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9월이었다.

남들은 한·일 월드컵에 환호하고 있을 때 나는 술과 함께 보내버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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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나는 소장이 막 바뀌려는 현대택배 김해 영업소에 가지고 있던 3밴 승합차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얼마 후 소장이 바뀌고 나는 영업력을 발휘하여 구역 내에 있는 신발 물류창고와 집· 배송 계약을 현대택배 본사 차원에서 계약을 했다. 택배비만 월 1000만원이 넘는 대형거래처 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소장은 나를 정식 사무실 직원으로 채용했다. 사무실장과 새로운 탑차와 함께 말이다. 그때부터 나는 오실장으로 불렸다.

그렇게 시작한 일은 8년 만에 끝이 났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나에게 또다시 시련이 다가 왔다. 평소에도 즐기던 술을 2002년 사기당한 그 시점으로 다시 돌아가 폭음의 연속이었다. 심지어 밤새 술먹고도 새벽 4시 호출이 오면 창원 택배 터미널을 오가는 위험한 행동을 자주 하곤 했다. 1톤 차도 아닌 11톤 차를 말이다. 그 와중에 당시 고2 였던 아들은 사춘기에 접어들어 나를 더 힘들게 했다.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그 때의 일을 아들은 모두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할 수 없이 제 엄마 곁으로 보내버렸다. 이제 세 식구만 남았다. 아침이면 밥을 하고 반찬을 만들고 된장찌개와 계란찜이 전부지만 딸을 학교에 보내고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면서 자연스레 술을 찾게 되었다. 힘들었다.

더 이상 무리였다. 택배일을 그만두고 난 후에 또 다시 술독에 빠져 살았다. 처음으로 위로 올리고 밑으로 싸는, 무언가가 어깨를 짓누르는 무력감으로 난생 처음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병원이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 후로도 나는 수시로 입·퇴원을 반복했고, 술만 찾게 되었다. 당시에는 일반 건강보험이었으므로 병원비가 만만치 않았다. 결국은 보다 못한 아버지는 동생집으로 내려가시고 남은 것은 나와 딸 뿐이었다.

그래도 정신차리지 못했다. 딸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오는 길엔 어김없이 까만 비닐봉지가 손에 들려 있었다. 소주 였다.

그러기를 2~3개월 흘렀을까? 딸을 동생 집에 잠시 맡기고 또 다시 병원에 입원했다. 처음 입원 했을 때는 찾아오던 가족들과 전 직장동료들도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아버지만 가끔 들릴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딸이 이상했다. 작은 집에서 안자고 같은 학교 남자친구 집에 있다고 그 애 엄마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는 환자복 차림으로 그 집으로 가서 죄송하다는 말만 남기고 딸을 데려 왔다. 착하기만 했던 딸의 이상행동이 내 탓인 것 같아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할 수 없이 중 2 였던 딸을 제 엄마 곁으로 보내고 말았다.

 

4

이제 나혼자 였다. 나 혼자만의 원룸 생활이 시작 되었다. 병원에 있으면서 딸을 보내고 **병원에 있으면서 많은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병원에서 진단 내린 족저근막염, 하지불안증, 알코올성 말초신경염 등이 그것이었다. 내가 한사랑병원에 오게 된 것은 정말 얼떨결이었다. 아버지, 누나, 동생 그리고 복음병원 주치의 선생님의 권유로 내발로 걸어온 것이었다. 그때가 20113월이었다. 한 달간의 병원 생활 중 유일하게 되는 것은 담배였다. 당시엔 흡연 규제가 없었으니까.

퇴원 후에도 근막염 등 3가지 고통은 늘 나를 괴롭혔고 그 고통을 잊기 위해 술을 찾는 악순환이 계속 되었다.

생활은 내가 병원에 있는 동안 막내 동생이 발품을 팔아 나를 보호 1종으로 만들어 매월 나오는 수급비로 생활 하고 있었다.

물론 그 수급비는 나의 술값으로 지출되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시간은 흘러 갔고, 같은 해 10월 다시 이곳에 입원하였다. 물론 그동안 **병원을 가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수차례 입퇴원을 반복한 끝에 다시 한사랑에 온 것이었다. 이번엔 3개월이었다. 2011년 연말에 퇴원한 나는 이래서는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 딸을 영원히 보지 못할 것 같았다.

아침이 되면 술을 찾던 내 손에는 벼룩시장, 교차로가 들려있었다.

하지만 쉽지는 않았다. 할 수 있는 일은 정해져 있었다. 학원차, 주유소, 기업체 중식배달 등 안해 본 일이 없었다. 하지만 그 일들도 오래가지 못했다. 길어야 1년 반 정도, 하는 일 마다 그 모양이었다. 물론 술 때문이었다. 4년은 나름대로 일을 한다고 했지만 2년은 술로 보내 버린 것이다. 내가 자살을 시도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30알의 약을 먹고 소주 서너병, 번개탄을 피웠다. 하지만 아침에 깨어났다. 다시 복음병원에 입원했다. 입원 하면 제일 먼저 찾는 곳이 엄마가 계시던 방이었다. 1인실 이었기에 환자가 없을 때 들어가 보기도 하고 침대에도 누워도 보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과 가신 후를 내가 술에 절어 사는 것이 마치 그 이유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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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6년 만에 한 사랑 병원을 다시 찾았다.

2017